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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

한스에겐 김미경 선생님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

by 한가희김 2021.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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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실 고전문학을 잘 안 읽었다. 어렸을 때 문학도서 억지로 읽었다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됨에도 억지로 꾸역꾸역 읽었는데, 그렇게 읽은 책들이 도리어 나를 문학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 다시 민음사 북클럽에도 가입을 하고, 북클럽에서 오는 책도 받아 보았다.

내가 고른 책 중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책이 있었다. 어떤 분들은 왜 고등학교 때 읽어야 할 문학 서적을 이렇게 나이들어 읽냐고 핀잔을 주실 수 있는데... 그 당시 난 고전문학을 읽어도 지겹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쉽게 묘사하면 될 것을 왜이리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용어로 묘사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표현들은 저자의 당시 시대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 마디로 그 당시에는 그런 책들이 선호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는데... 웬걸... 주인공인 '한스 기벤라트'는 어렸을 때의 나와 아주 비슷하다. 특히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스 주위의 삶이 나와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똑같았구나. 그 때도 주위 사람의 기대에 맞춰서 한스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을 치기 위해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등을 쉬지도 않고 배웠던 것이다.


그래도 이 방에서 그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즐거움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시간들을 보냈었다. 그것은 자부심과 도취, 승리감에 가득 찬, 꿈과도 같은 기이한 시간들이었다. 그때에 그는 학교나 시험,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보다 높은 존재의 영역을 꿈꾸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뺨이 두툼하고 평범한 학교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더 나은 존재라는 예감이 한스를 사로잡았었다. 언젠가는 속세에서 벗어난 높은 곳에서 우쭐대며 이들을 내려다보게 되리라는, 건방지면서도 행복에 겨운 예감이었다.

 


한스가 가려고 했던 길은 한 마디로 그 당시의 '개 천에서 용'이 나는 '사다리'인 <신학교 → 수도원 → 목사 or 교수>가 되는 길이었다. 이 길이 자신에게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위치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한스는 젊은 나날의 즐거움은 내동이치고 오로지 우수한 학생만이 입학할 수 있는 신학교 입학시험을 쳐서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에 성공한다. 한마디로 한스의 어린 시절은 과거 내가 겪었던 입시 위주의 교육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었다. 다만 이 소설에서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가 한스에게 시험에 떨어져도 다른 길이 있다고 부드럽게 권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입시를 치른 때의 한국 사회처럼 오로지 대학에 목매는 그런 사회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럼에도 한스가 결국 스스로의 위치에 자괴감에 빠져 자살인지 실수인지 죽어버리는 결말이 왔다는 점에서 어느 사회나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결코 개인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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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는 원하던 신학교에 2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입학하였으면서도, '헤르만 하일너'라는 반항적인 천재를 만나게 되면서 운명이 뒤틀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하일너라는 인물의 장래는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왜냐.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알았으니까. 설사 천재였던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면 보장되는 삶을 포기하였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나름의 자아가 확실하게 구축된 만큼 다른 길에서도 꿋꿋이 인생을 개척해 나가리라는 점은 의심이 들지 않았다.

문제는 한스였다. 한스는 오직 다른 사람의 평가, 가족의 기대 등등에만 목을 메어 온 삶이었다. 본인은 잘 모르는 듯 했지만, 다른 사람의 평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그에 맞춰서 살던 학생이었다(이것도 나의 과거와 유사하다. 아마 내가 자란 시기의 대부분의 공부 잘했던 학생들이 이렇지 않았을까). 따라서 한스는 하일너를 만나 자신의 삶에 다른 시각(성적이나 시험이나 성공에 의해서가 아닌, 양심의 순결이나 오욕에 의하여 인간이 평가되는 그러한 세계라고 소설에서 표현을 한다)을 갖게 된 이후에는 자신의 그동안의 인생과 하일너가 보여준 세계관 사이에서 적응을 못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도 신학교에서의 인생을 포기하게 된다. 한스는 전형적인 모범 학생이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그래서 항상 노력하여야만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이것도 어떻게 된 것이 나와 비슷하다), 한 번 길을 벗어나자 그 길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다가 결국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했던 삶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만일 하일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한스는 아마도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수도원으로 가서 결국 목사나 대학교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우월한 위치를 획득함에 성공을 하여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성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다른 내적 갈등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전혀 그런 것이 없었을 때에는 아마도 한스에게 평탄한 삶은 예정된 수순일터.

한스가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그가 원하던 삶에서 벗어나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육체노동을 하는 대장장이로서의 기술을 연마하고 있을 때, 그에게 그러한 삶도 가치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멘토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한스는 잠시 엠마와의 사랑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듯 하였지만 엠마가 사라지고 대장장이로서의 삶에 대한 어떠한 가치도 느끼지 못하자 결국 술기운에 실수인지 자의인지 삶을 마치게 된 것이다(소설에서 한스는 그 전에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젊음의 기운이 그로 하여금 삶을 유지하도록 붙잡아 두었기에 대장장이로서의 삶이라도 살려고 했는데, 술기운을 빌려 그의 오래 전 계획인 '죽는 것'을 실행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스에게 삶을 유지하기 위해 대장장이 일을 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있고, 의미있는 꿈이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바로 내가 좋아하는 MKYU의 김미경 선생님처럼 말이다. 김미경 선생님은 '생명의 꿈'도 꿈이라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일도 '꿈'이라고. 꿈이라는 것이 반드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만 꿈이 아니라고. 한스 기벤라트에게 김미경 선생님이 옆에 있었으면, 한스는 아마도 술기운에 자살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나나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참으로 좋은 시대를 살고 있는 듯 하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동기 부여의 강사님도 계시고 말이다.

내가 보기엔 변호사 커뮤니티 등에 올라오는 자신의 삶에 회의적인 글들은 바로 우리 변호사님들도 한스 기벤란트와 같은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행히 한스와 달리 무사히 그 과정들을 견뎌 원하는 바를 성취하셨지만, 그 성취한 바가 자신이 생각해왔던 공명심, 우월감 등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성공적인 삶과 거리가 멀 때 '내가 왜 변호사가 된 것이지? 이럴려고 변호사가 되었나?'라는 생각을 하시는 듯 하다. 아마도 외적 동기에 의해 법조인이 되신 분들은 한스가 겪는 내적 갈등 등을 겪으시게 될 일이 있다면, 더더욱 이런 생각을 늦으막하게 하실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보면 많은 위로가 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뒷 부분을 보니 '수레바퀴 아래서'를 지은 저자 헤르만 헤세는 한 때 수도원에 입학하였다가 시인이 되고 싶어 자퇴를 하고 한 동안 신경 관련 증세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소설이 어떻게 보면 과거 그의 삶을 일부분 투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인생의 우여곡적을 극복하고 오랜 기간 살아 많은 저서를 남기셨다. 즉, 한스와 다르게 같은 상황을 극복하신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 많은 젊은 변호사님들이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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